6개월 동안 묻어뒀다 다함께 열어봐
편지·선물·사진 등 온가족 마음 담아
"평소 못한 말 털어놓으니 더 가까워져"

“가장 힘들 때 함께 있는 게 가족이에요. 비록 당신은 다쳐 누워 있지만, 우리 식구가 모두 이렇게 함께 있는 게 행복해요”(이경아씨가 남편 왕상문씨에게).

“천사가 보내준 우리 딸, 네가 있어 엄마는 힘을 얻는단다”(엄마가 재원이에게).


“영어로 패밀리가 ‘Father And Mother I Love You 아빠 엄마 사랑해요’라는 것 아세요? 늘 곁에 있기만 해도 좋은 게 가족이에요” (성민복지관 게시판).


지난해 12월 22일 오후 서울 신림동 성민사회복지관 지하 강당. 신림10동 지역의 열다섯 가족들이 지난 6개월간 고이 간직해 온 ‘가족 타임캡슐’을 개봉하기 위해 모였다. “자, 열어주세요”라는 구령과 함께 뚜껑이 열리자 곳곳에서 “와” 하는 환성이 터져나왔다.


이경아(32)씨는 지난해 10월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있을 때 느낀 감정을 쪽지에 적어 타임머신에 넣어 뒀었다. 이씨는 남편에게 보낸 이 글에서 ‘여보, 우리 가족이 가장 행복했던 날… 아빠가 사고로 다리를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지금이라고 생각하니, 가장 힘들 때 힘이 되는 것이 가족이라고 느꼈어요’라고 썼다.


애틋한 사연을 담은 편지, 아빠 엄마 결혼기념일과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을 표시한 ‘가족 달력’, 가족들의 행복한 한때를 담은 사진 등 타임캡슐에선 열다섯 가족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동협이는 지난 6개월간 타임캡슐을 개봉하는 이 순간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 형(동욱·16)이 자기가 선물한 우산을 펴보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형아가 우산을 잃어버려서 만날 비 맞고 들어왔어요. 그래서 형아 비 맞지 말라고 샀어요.” 동협이는 우산을 사기 위해 한 달여 동안 하루 100~200원씩 용돈을 아껴 ‘거금’ 5000원을 모았다.


가족들은 평소 터놓고 하지 못했던 말들을 나누며 감정이 서로 북받쳐 올랐다. 초등 2학년인 재원이는 ‘엄마, 만날 늦게 들어오는데 힘들게 해서 미안해요…’라고 쓴 편지를 읽다가 “왕~”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품에 안겼다. 혼자서 혁표·재원 두 남매를 키우는 엄마는 아이들에게 ‘천사가 보내 준 우리 딸 재원이, 항상 씩씩한 혁표를 보면서 엄마는 힘을 얻는단다’라고 썼다. 류경(12)이는 아빠가 못 오고 엄마만 와서 내내 시무룩했다. 하지만 타임캡슐을 열자, 안에선 아빠가 미리 써놓은 편지가 나왔다. ‘아빠 힘의 원천인 우리 딸 류경이가 아빠는 자랑스럽다. 항상 같이 하지 못한 미안함을 편지로나마 보낸다…’로 시작하는 편지를 읽다 류경이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들은 6개월 전 자신들이 쓴 편지를 다시 꺼내 읽으며 무척 신기해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지은(9)이는 두 살 난 막내 동생을 키우고 있는 엄마 아빠에게 ‘엄마 아빠, 아기 보시는 게 힘드시지 않으세요? 전 아기가 너무 귀여워서 안고 싶어요. ♡사랑해요♡’라고 쓴 편지를 읽었다. 하지만 6개월 전에 쓴 편지의 글씨가 너무 삐뚤빼뚤해서, “이제는 더 잘 쓸 수 있는데…”라고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힘찬 가족’이라는 사회복지관 프로그램의 일환인 이번 행사에는 맞벌이 가정과 한 부모 가정 등 다양한 형태의 가정이 참가했다. 그동안 가족 간의 대화가 많이 부족했다고 느꼈던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힘찬 가족’ 모임에 나오면서 예전보다 가족들 간의 관계도 좋아지고 대화도 늘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현영이(16) 엄마 양희순(39)씨는 “아들이 사춘기가 되니 대화하는 데 벽이 생겼는데, ‘가족뿌리 찾기’나 ‘가족 달력 만들기’ 등을 하면서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됐다”며 “아들의 성격을 알게 되면서 나도 아이들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게 돼 마찰도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서먹서먹했던 여러 가족들은 자주 만나면서 이제 한 식구처럼 됐다. 지난 12월부터 연말연시를 맞아 매달 한 번씩 봉사활동도 나가기로 했다. 지난 6월 23일로 총 13차례의 프로그램이 끝났지만, 힘찬 가족들은 ‘자조모임’을 통해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불우이웃돕기 등 봉사활동도 해왔다. 이날 타임캡슐 개봉 행사를 겸한 송년 모임도 가족들의 제안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김숙연 사회복지사는 “어려운 환경 때문에 가족 내의 문제 해결에만 급급했던 이들이, 프로그램을 거치면서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지역공동체로 관심을 확대해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힘찬 가족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지은이 아빠 왕상문(39)씨도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고, 꼭 자기 식구뿐 아니라 다른 이웃들과도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된 점이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출처 <조선일보>